일반적으로 맏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대단하지요. 부모 자신도 처음 길러보는 아이기에 더러는 실수도 하면서 항상 조심해서 보물 다루듯이 대하는 것은, 첫 정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함께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이하로 내려가면서부터는 자녀에게 무감각해지는 것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용하여 그럴까요? 아니면 부부간의 사랑이 식어서 그럴까요? 어찌하였던 자녀들은 부모에 관해 여전히 예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맏이는 대체적으로 온순하고 포용력이 있으나 둘째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것이 보통입니다. 그것은 맏이는 가만히 있어도 부모들이 모든 것을 챙겨주고 받아주는데 비해, 둘째는 주장하고 요구해야만 겨우 반응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스스로 쟁취해야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경험했기 때문에 둘째는 잘 울기도 하고 고집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맏이가 아닌 자녀들에 의해 더 크게 요동치고 변화되어 발전하였음을 생각할 때 둘째에게 반의반만큼의 관심과 애정을 보여줘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커 나갈 것입니다.
큰애가 결혼하고 유학을 가고 난 후 세 식구만 살게 되었는데도 둘째의 마음속 앙금은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몇 년 전 이틀 동안 끙끙거리면서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던 둘째를 아내가 밤늦게 응급실로 데려가자고 했을 때 모른 척 했더니, 아내 혼자 둘째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각종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던 중 느닷없이 미안하다면서 혹시 죽을병이면 시골에 내려가서 마지막 작품을 써야겠다는 둘째의 말에 놀란 아내가 밤새 뜬눈으로 병실을 지키면서 모자간의 용서와 화해가 시작되었던 모양입니다.
글씨를 쓸 줄도 모르던 때에 낡아서 터진 엄마의 바지를 보고는 말없이 나가, 집 근처에 있던 우체국에서 저금했던 돈을 찾아 엄마 옷 사 입어라고 건네주어서 아내를 울렸던 둘째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항상 헌것에 익숙해서 큰애가 무언가 새것을 갖게 되면 언제 자기에게 줄 거냐며 부러워했는데, 어느 지인이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사준 새 운동화를 품에 꼭 껴안고 자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중학교 때 어느 선생님께서 “잘난 형 때문에 힘들지?”라는 한마디 위로에 눈물만 뚝뚝 흘렸다는 그 애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포도원지기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자녀들을 키우다보면 더러는 속상하는 일들도 있지만 지내놓고 보면 그 또한 잊혀 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매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랍니다. 요즘 들어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둘째에게 마음속으로 응원합니다. ‘힘내라, 둘째야! 우리 집 세자(世子)는 바로 너야’